[연재13] 어떻게 하면 소셜이노베이터가 될 수 있나요?


2부 유엔에서 바라본 세계 

6) 진정한 행복의 기준을 찾았다면






유엔에 있으면서 전 세계 10여개의 최빈국을 방문했다. 보통의 관광여행으로는 방문하기 어려운 특수국가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의 유엔의 여러 협력사업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최빈국의 속도감 있는 변화를 느끼다 

한때 '서아프리카의 파리'라 불렸던 코트디부아르(예전 국가명 Ivory Coast)는 70년대의 시공간으로 돌아갔다는 착각이 들만큼 '과거의 영광'이 퇴락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나마 괜찮고 안전하다는 호텔에는 TV나 전자제품이 하나도 없었고, 벽에는 과거 내전때 생긴 총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내무부를 방문했을 때도 전기가 없어 엘리베이터가 가동이 안되고 계단을 이용해야 했고, 공무원들은 월급이 정기적으로 지급되지 않아 부업을 여러개 해야한다고 했다. 하지만 거리에 나가보니 시장에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확연히 느껴졌다. 그때가 2007년이었는데, 노천에서 우연하게 관찰한 구두수선 주인은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등지고 당시에 나도 없었던 터치폰 스마트폰을 가지고 소일거리를 하고 있었다. 개발도상국에서 ICT와 스마트폰의 활용과 보급이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다는 것을 경험했던 순간이었다. 


이름만으로도 뭔가 묵직한 느낌이 되는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 수도 아쉬가바트. 영어로는 '사랑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이곳은 '사막 한 가운데 세워진 미국 워싱턴시'라는 느낌을 자아냈다. 당시 대통령이 물과 빛을 너무 좋아해서, 도시에는 24시간 운영되는 다양한 분수와 가로등이 있었고, 왠만한 건물과 공원은 깨끗한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내가 주관한 컨퍼런스의 주제는 '전자주민등록제도' 도입이었는데, 과학부총리도 참석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한국의 발달된 주민등록제도처럼 우리나라에도 빠르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전자주민등록제도 도입이 시급하다'는 그의 말을 듣고, 당시 권위적인 국가로 비판받았던 투르크메니스탄이 전자주민등록제도를 도입하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고민을 하기도 했다.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 갔을 때는 매년 연례적으로 열리는 데모로 인해 준비했던 역량개발 워크숍이 3일간 연기됐던 초유의 상황도 있었다. 절대로 홀텔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정부 관리자의 말대로 우리 팀은 3일간 호텔에서만 머물었다. 정기적인 데모로 모든 사회경제 시스템이 마비되는 방글라데시에서는 나이키 등 외국계 기업이 점차 철수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역시 철수까지 고려했지만 다행히 상황이 호전되어, 정부관리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원래 행사장소를 옮겨 조촐하게 교육훈련을 진행할 수 있었다. 모바일과 ICT를 다양한 공공서비스에 접목하고자 하는 열정은 대단했다. 한국의 사례에 대한 다양한 관심과 기존의 물적인 인프라는 뒤쳐졌지만, 새로운 '가상의 인프라'(인터넷과 모바일)에서는 선도국가가 되고자 하는 정부의 정책방향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곳에서 방글라데시 정보통신부 장관의 감사패를 받았는데, 유엔에서의 마지막 출장을 나름대로 마감하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멋진 리더와 함께 하는 기쁨 

다른 직원들은 뉴욕 등과 같은 소위 선진국 출장을 주로 갔는데, 나는 특히 최빈국에 배정되는 것이 조금 의아해 당시 원장님이었던 최종무 대사님(전 주네덜란드 대사)께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주신 답변이 잊혀지지 않는다. "유엔에 있을 때만 갈 수 있는 나라가 있는데, 그런 나라들에 가보는 게 김정태 팀장의 나중을 위해 도움이 될꺼야." 그 뒤로 스리랑카과 부탄으로 계속됐던 출장길에 나서는 내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최종무 원장님과는 또 다른 따뜻한 기억이 있다. 유엔사무부총장 및 주한 유엔기구 관계자를 비롯해 500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유엔의 날' 행사를 기획해 진행한 적이 있다. 다양한 물품을 옮기는 교통비와 차비, 자원봉사자 식비 등 작은 경비 처리가 많았는데, 당시 유엔 규정으로는 이러한 간접비 사용 신청과 승인이 지극히 복잡해 불가능한 구조였다. 결국 사비를 써야하는 상황이었는데,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 최종무 원장님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김 팀장, 이거 일단 받아" 

"원장님, 이건..." 건네주신 하얀봉투를 열어보니 100만원이 담겨져 있었다. 

"관련 예산이 없어 고생 많은 것 다 알고 있어. 내 개인돈이니깐 걱정하지 말고 필요한 곳에 마음껏 써"  


현실이 규정하는 가능성의 범위에 머무는지 말고, 적극적으로 가능한 범위를 찾아나서도록 격려해주신 원장님이야말로 소셜이노베이터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리더십의 정의가 아니라 행동으로 리더십의 모범을 보여주는 소셜이노베이터가 곁에 있다는 것은 엄청난 배움과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는 축복일 것이다. 


 

국민총행복(Gross National Happiness)의 나라에서  

내 출장 중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곳은 바로 부탄이란 신비로운 나라였다. 이곳은 국민총행복이란 개념으로 유명한데, 부탄은 1970년대 후반부 '행복'을 국가발전의 척도로 삼아왔고 이를 헌법에 반영해 '문화적 전통보전' '환경보존' '부의 공평한 분배' 등을 명시화했다. 2008년 금융위기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행복지수에 대한 논의와 관심이 시작된 것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빠른 통찰과 비전이 아닐 수 없다. 부탄에서 국민총행복은 그냥 정치의 구호와 같은 바른 말로만 끝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환경보존' 목표의 경우에는 '전체 국토의 70% 이상은 반드시 개발되지 않은 삼림'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세웠다. 그 보다 못한 녹지와 숲은 국민행복에 저해가 된다는 생각때문이다. 한때 부탄의 수도 팀푸에는 교통신호등이 도입되었다가, 오히려 교통체증과 불편함들이 늘어나자 시민들은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신호등을 철거해달라'고 했다. 지금도 팀푸에는 교통신호등을 발견할 수 없다. 


최빈국에 출장을 오면 대부분 일과가 끝나고 현지에서 저녁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나는 한국에서는 바빠서 잘 읽지 못하는 책, 특히 원서를 가져와 진득하게 읽는 편인데, 부탄 출장에 나를 따라온 책이 'Design for the Other 90%'(후에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이란 제목으로 번역출간)란 책이었다. 가볍게 페이지를 넘겼던 이 책은 유엔을 떠나 새로운 발걸음을 옮겨야겠다는 마음을 들게 했던 '무서운' 책이었다. 공급자 중심의 시각에서 편하게 일을 처리했던 내 모습과 달리 이 책은 수요자 중심의 시각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차분히 전달해줬다. 무엇이 과연 진정한 발전이며, 행복하다는 것의 진정한 기준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했던 부탄에서 만난 '수요자 중심의 관점'이라는 이야기는 충분히 내게는 파괴적인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었다. 새벽에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개들이 무리를 지어 크게 짓기로 유명한 팀푸의 조용한 시간에 책의 페이지를 하나둘 넘기는 그 시간이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첫 시작이었다.  



새로운 게임의 규칙

소셜이노베이터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이거나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규칙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달라지고, 기준에 따라 행복함과 불행함이 결정되는 현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이란 삶'이 아니라 바로 잘못된 규칙과 기준일 경우가 많다. 부탄과 같이 소셜이노베이터는 새로운 기준과 관점을 통해 진정한 임팩트를 찾아나서게 된다. 기준과 관점이 달라지면 당연해 보이는 '교통신호등'의 의미도 새롭게 느낄 수 있다. 행복의 본질, 임팩트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달을 때, 어떤 행동 어떤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지가 보이게 된다. 본격적으로 소셜이노베이터의 게임에 뛰어들기 전, 내가 무의식적으로 차명하고 있는 게임의 규칙은 과연 무엇인가 점검해보라. 새로운 게임의 규칙 없이는 새로운 게임은 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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